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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오나 봉사단출신전문가 파견..아이교육 주거 생각해야
작성자 박** 작성일 2026.05.09 조회수 64
엔지오나 봉사단출신전문가 파견..아이교육 주거 생각해야
고등학생 자녀와 대학생 자녀 장학금 혜택. ...한국에 귀국하면 살 집아파트분양혜택 공무원시험시 가산점 법제화
26.05.09 0554l박향선na4amich
검토 전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엔지오나 봉사단출신전문가 파견..아이교육 주거 생각해야
고등학생 자녀와 대학생 자녀 장학금 혜택. ...한국에 귀국하면 살 집아파트분양혜택 공무원시험시 가산점 법제화26.05.09 0551l박향선na4amich 검토 전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국제기구에 나갈려면 배우자가 영어 및 다른외국어도 할줄 알아야한다.그리고 쇼셜라이즈을 해서 다른 사람과 격의없이 지내야하고 파티에 나가 잘 어울려야한다.

1998년도 한국에 들어와서 선을 봐도 체팅을 해도 일반적인 사람들중에서는 배우자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머니가 선을 보라고 하는 사람중에는 고등학교만 나온 사람도 있었다. 집이 있다는 것인데..말한마디 못하고 못생겼다. 말이라도 잘 하거나 자신을 어필도 못하고 ...
외국에서 돌와왔을? 여동생은 어머니가 자기을 말도 안되는 상대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고 했다. 약혼만 하고 합의금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챙기었다는 이야기을 하며 동네 목포계원이 어머니에게 소개헤 미국교포와 선을 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학력이 중학교인가 아주 .....그 친척들과 제주도 갔다가 돌아와 파혼을 했다는 이야기을 햇었다. 그리고 기차에서 중국인을 만났다는 이야기을 얼핏했다.
외국어 나가는데는 집은 별로다. 외국어와 사람들과 파티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호텔에 어색하지않게 차한잔하고 유머가 있으면 좋고 직업이 있다면 좋다.
이젠 내가 나이가..
체팅으로 만난 애아빠가 영어도 하고 기술도 있고 외국에 아프리카에도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는 잃어버린 꿈을 꾸었다.
처음에 애아빠는 말도 잘하고 키가 좀 켰다.한가지흠이라면 걸음이 빠르고 한장소에 오래있질 못하고 돈을 너무 헤프게 쓰는 것이다. 인터넷 웹피에서 체팅으로 만났는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보니 없어?다. 사진에는 배경에는 와인바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조용하고 근엄하게 구는 사람보다는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동기들은 다 결혼을 했고 내가 체팅해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집가정환경을 들어보면 다들 싫어했다.남동생들이 이혼을 해서 내가 부모님과 조카들을 돌보고 잇었다. 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집 가정환경을 보는 것이다.국제기구로 나가기에는 너무 길이 험하다. 내가 일을 해야하는데 나을 편안하게 안해주고 시끄럽게 한다면 어떻게 일를 할 수 있겠는가
때에 따라서는 부엌에서 같이 살림도 하고 식사도 준비해야한다. 내가 피곤하면 밥이나 따스한 음식도 준비해야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보니 프랑스 남자애 행동이 이해가 간다.보통 파티나 초대을 받으면 완성된 음식을 먹는데 프랑스애는 초대해서 내가 보는 앞에서 프랑스식볶은 밥을 했다.
나중에 프랑스애 여자친구가 프랑스에서 와서 같이 살아서 그여자애에게서 프랑스어을 배웠다.
다른 백인애들은 키도 크고 매너도 좋다.집에 방문약속도 않고 와서 차 한잔하고 간다. 휴일에는 간단한대화정도...
춤이야 어쩌다 한번이지만 외국에 나가면 사람을 대해야해서 어쩔수없이 상대해야한다.한데 나는 사교춤을 배우지않아 잘 못춘다.
한국에 돌아와서 사교춤을 배우려 했는데 집에 여러가지 일이 벌어져 시간이 30년이간것이다.한 27년이 그냥 흘렀다.
1997년 부탄에서 인도에 최대사가 왔다가고 wfp부탄대표 식사초대로 식사을 하고나서 덴마크애가 인사도 하고 나중에는 자리가 마련되어가면 그애가 있었다.그냥 그때는 그런가했다
왜냐면 그애는 영국vso에 긴금발머리애와 다정하게 거의 붙어서 있는 것을 봐서 그냥 그런가했다.
나중에는 혼자서서 나에게 웃었다다른 백인애들은 집앞을 노크하고 차 한잔마시며 이야기했다.공적인 일이라면 un빌딩에서 차한잔 하면 됐다. 결과적으로 다른 백인여자와 일본여자애들에게 안좋은 꼴을 당하는 결과을 초래 했다.
그들은 대화도 중요시한다.나중에는 유시팡rnrc에 메던이 나서서 어디에 가자고 하고 날짜을 정했다. 메던은 이란계로 아버지가 이란박사다.호주에서 유학하고 호주애서남자 간호사와 동거했다고 하고 나중에 부탄에 그 호주 남자친구가 왔었다는 이야기을 들었다.나와 같은 시기에 unv가 된 린다울프라고 세이브칠드런에 물리치료사로 왔더가 부탄전경련에 부회장 아들과 결혼했다.린다울프는 미국유대인 이었고 아버자가 미해군에 근무한다고 했다. 린다가 연상이다.헌데 란다의 남편은 메던에 고등학교 시절에 연인이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그 남자가 심각한 모습으로 와서 인사을 하고 갔다.
내가 귀국 할무렵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 낳고서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날카로웠다.unv평가회의에서 내가 맨스때문에 패드를 이야기하니 린다가 자동차로 데려고가 패드를 준비해주었던가...그때 애기낳는다고 미국에 다녀오고 여러가지 애기용품인가 뭔가로 힘들어했고 unv계약이 2년인데 계약만료시점에서 애기 키우느라 힘들어서 그런가보다 했다.
아시아개발은행관계자와 일을 하던 양친은 내가 계약만료가 거의 다되어가자 세계농업식량기구fao와 세계식량기구wfp에 캔디데이트되었다고 전해주었다
현지에서는 abc프로젝투와 호텔등에서 컨택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국제기구 공무원은 5년까지 임기가 연장 가능하다며 나보고 임기을 연장하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왜 한국에 가냐고 해서 나중에는 결혼을 위해서 결혼하고 외국으로 다시 나갈것이라고 이야기을 했다.
마국 unv가 계약을 더채우지않고 스위스국제기구사업메니저로 자리을 옮기는데 월 6000달러와 집과 자동차제공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 직장잡기가 어려웠고 다만 서울 undp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한국에 돌아온지 2년 더되어 옷. 신발. 화장품. 백등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카페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미군용산카페에 크리스마스에 초대을 받았는데 이혼하고 애를 혼자서 키우다보니 옷이나 구두. 백등이 없었고 나를 에스코트해 줄 파트너가 없었다.
사람들은 오해한 것이 아닌지. 나에겐 교통비조차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부모가족으로 정부보조금이 나온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관리한다고 햇었고 나중에는 중촌동에 살았던 큰 남동생이 계죄을 관리한다고 한다가 어머니동네로 이사을 하고 딸이 중학교 1학년 봄에 나에게 통장과 나무도장을 주었다.그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동생이 나에게 월 일정액을 주었는데 어느날은 팔에 커다란 멍이 들어서 왔었다. 내 큰 올캐는 지금은 이혼을 했지만 포천에서 중학교때 역도을 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와 청소을 하면서 냉장고을 치우는데 올캐가 냉장고을 들어 올렸다.남동생은 허리가 아프다.이집에 이사왔을때 같이 살다가 가죽공방을 어머니가 보험에서 약관대출를 받아서 가게을 조그마하게 내어주었다. 그전에 살던 집에서 받은 돈에 일부을 남동생이 가죽을 배우러 다니는데 청주와 서울을 다니는데 교통비와 일부재료등 교육비에 보탠것으로 안다.
이집에 이사오기전에 이집근처의 세븐 나잇인가 맥주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셔서 어머니와 데리러 온적이 있다. 이혼을 한줄알았던 백계숙과 별거중이엇고 이혼장을 받았다는 것이다.12년전일이다. 여자조카가 고등학교들어가자 자기엄마에게 갔다.어머니 말에 의하면 막내남동생이 돈을 얼마마련해 선화동에 집을 얻어주엇다고 햇다. 여자조카들은 대전여자상고을 다녔다.남동생들과 구굴다리 옆집에 살다가 나중에는 자기 엄마에게 간것이다. 남동생들이 아침에 식사챙기기 힘이 드니 콘프라이트을 주었다고 한다.어머니는 같이 살때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주었다. 반찬이 없어도.그리고 어머니도 나이가 드니 아침을 챙기기가 힘들지 않앗나싶다.나이가 그떼 나이가 70이 다되었고 어머니 꿈은 조카들이 자신에게 용돈을 주어 집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남자조카인 덕환이가 고등학교 졸업무렵에는 꿈에 뿌플었는데 고등학교시절에 경주에 큰 외삼촌집에 엄마가 가자고 햇다면서 내 새 노트북을 가지고 내려갔다.글을 쓸려고 산 것인데 조카가 자기 EBS공부한다고 가져가서 나중에 거의 고장이 나서 나에게 주었다. 엘지것으로세일할때 70만원주었나십만원을 어머니가 일부 도와주엇다.15년됐나보다.
봉사단 다녀온 사람들이나 UNV다녀온 사람들 전화나 이야기을 들어보면 조카을 보는 경우가 많고 나이가 있다보니 결혼도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김영희에 아이을 잘만드는 여자 책을 읽어보니 독일남자는 김영희보다 어렸는데 아이가 셋인 여자과 결혼을 해서 그 남의 아이까지 데리고 독일로 갔다. 너무 놀랬다. 김영희는 아이들 교육에도 열심히였는데 버리는 피아노인가 중고피아노로 아이들교육을 해서 아이가 피아노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남자들이 여자의 집안을 본다면 난 나을 에스코트해 줄 능력을 보고 나에게 보고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또한 내가 집안이 안좋아도 나를 키워준 부모님에게 반말안하고 나의 가족을 내가 바쁠때는 돌봐도 줘야한다.
물론 섹스파트너는 체인지 할 수도 있다. 내가 부탄에서 돌아와서 여러잡지을 ?는데 우리나라 상류사회나 전문가집단은 부부동반파티를 하면서 파트너을 체인지해서 정신적고통을 받는 내용의 기사가 있었다.처칠전기문을 읽는데 영국상류사회는 누가누구자식인지 모른다는 내용이 나와있었다. 자식이 크면 기숙사학교에 보내고 그래서 교육를 중요시하는 나라가 된것같다. 20세기초 영국에서는 낡은성을 가진 귀족들이 미국의 돈 있는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해 노후화된 성을 고치고 아가씨는 상류사회에 귀족신분으로 사교계에 진출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체팅에서 만난 나도 처음에 애아빠의 배경도 봤다.내가 가지지못한.애아빠는 제사가 필요없다고 했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 명절 걱정도 없다고.
막내외삼촌이 부산 mbc에 다니고 이모부가 부천에 검사라고 했다.그리고 집안이 이상한 것이 나중에 자기 이모부가 마약관계일을 하고 자기 아버지일을 이야기 안하는데 작은 아버지가 경찰이라고 했다.
7년전부터 un리쿠르팅과 대학장학생자료가 들어온다.나는 학사출신이다. 대학원을 못갔다.
어지간히 un에서 급한가보다. 나는 늙었고 영어도 스팰링이 잘 생각이 안나고 프랑스어공부하다 말아서 말도 어렵고 일본어도 신문은 보는데 말은잘못한다.스페니쉬와 금융쪽으로 갈 것이면 독일어도 좀 해야한다. 중남대학교에서 지난해에 괴테 인스티튜트가 철수햇다.
난 그들은 나을 뽑을때 산악지대가 많은 중남미로 보내려했었던 것같다.
방글라데시에 돌아와 파퓨아뉴기니에 최필곤은 네팔에 정은경과 커플로 알았다. 내스타일도 아닌데 몽골에 안효덕은 자꾸 한쪽으로 몰아갔는데 커피 한잔 별로 개인적으로 해 본 기억이 없다.
난 필리핀등 다른 단원과 친했는데 필리핀에 이강오가 우리 외가있는 순천쌍암군청에 어버지가 농토목과에 근무했다고 한다. 연락하던 애들이 연락이 안왔다. 막내이모가 그 당시1986년에 순천갔을 때는 슈퍼을 했는데 내가 봉사단파견시는 시골다방을 하다가 내가 봉사단 돌아왔을때는 식당을 했다.
그러니 내가 봉사단에서 배우자을 못구하고 체팅을 한 것이다.
2002년인가 3년인가 어느 대학동창은 내가 체팅으로 창원사람를 만난다고 하자 계룡시에서 대전까지 나온 친구는 군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나보내 해서 놀랬다.
나중에 보니 나와 있을때와 남자들과 같이 자리을 하는대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충남대 원예학과 연락처을 물어도 연락처을 안가르쳐주었었다. 상업농경영에 쓴 글을 보고 과친구가 연락을 했었다.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영농신문을 보고 연락이 온것같다.
이젠 다른 나라에 국제기구도 나가기 어렵다.나이가 있어서..58세다.
외교부나 koica 에서는 종교에 너무 연연하지말고 해외봉사단 귀국단원을 돌보아 나라의 초석으로 지역전문가로 키웠으면한다.
유럽인들은 국제결혼을 잘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국제결혼과 타국적사람과 이성교제에타캣과 아이들 교육에 대해 교육이 이루어졌으면한다. 부턴에서는 봉사단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국제결혼이나 현지인과 결혼을 해서 아이을 키울경우에 교육비가 현지인은 무료인데 외국인이거나 국제결혼을 해서 태어난 혼혈아들에게는 교육비가 몇배라는 것이다. ]
교육부나 이 오마이 뉴스에 일반인을 위한 국제 학교을 제안한 이유다. 국제결혼해서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국제학교가 어찌 부자들만의 학교인가엔지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돈을 많이 못번다. 부탄UNV오피서였던 아트에게도 아들이 둘이엇는데 교육걱정을 하고 주말에 부탄 장리미탕 운동장에서 아들과 아침에 축구을 해서 여러 생각이 들엇다.

딸아이을 대학을 보내는데 한남대 장학금 제도을 보니 선교사자녀들에게도 장학금 혜택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와 국제 이슈와 함께 일하는 엔지오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녀에게도 장학금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과거 사회운동이나 엔지오등에서 실무자들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해외공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대우해준다. 그러나 국제협력다에서 봉사단을 거쳐 전문가로 오래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책은 있는가>아이들의 교육비 지원이나 한국에 돌아왔을때 기거할 집이 있는가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도와주어 사업도 하고 교회을 돌면서 모금활동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해외봉사단은 어떤가이들이 지역전문가로 클 수있는 제도적 뒷받침도 없다. 우리나라도 상조로 결혼식과 장례식에 직장동료와 친목단체등에 간다.해외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각종 잔치나 회합도 참석해야 한다.해외에 뿌린 돈은 개인돈으로 한다.

한국에 돌아오면 받을 수가 없는 돈이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도 봉사단 파견시에 일정액에 판공비도 주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돈을 사용햇는데 그 이익을 누가 보았는가.

유엔브이 들 월례회의 나모임은 UNV회비에서 체크북으로 사인을 햇지만 지방에서 올라오는 UNV들이 있다고 연락이 오면 내가 내돈들여 그분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한끼 같이 햇었다. 시간이되는 다른 UNV들을 불러서 작은 모임을 했었다.돈이 있어서 한것이 아니라 그들은 나을 가난한 한국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라의 한국인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아프리카나 중동아시아. 몽골에서 온 UNV들 이야기을 들어보면 자기네 나라에서는 상류층이나 의사들이고...한데 모임을 주재을 잘 안한다. 그리고 돈도 잘 안쓴다.본국에 돌아가면 집마련이나 자식들 유학을 시킨다는 이야기을 한다.

UN에는 우리나라 과거에는 정부에서 재정경제부등의 공무원이 나갔다고 한다.그러나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UNV들은 오지로 알려진나라에서 활동하자면 UNVMLA이와에 판공비가 필요하다. 돈을 좀 쓸 줄 알아야 한다. 남에게 차 한잔 안사는 사람들과 과연 제3세계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있을까 우리나라에 미국평화봉사단으로 전라도에 파견된 한 미국인이 그당시 한국이 부패햇다고 사무실에서 안좋은 일을 본부에 보고햇다고 한다. 그러자 미국평화봉사단에서는 그 단원을 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한국인의 일에 너무 간섭하면 안된다고 말이다.

나는 방글라데시의 아사드게이트 원예핀매센타에서 ....그리고 부탄의 RNRC 유시팡에서 일어난 일을 오래동안 이야기 안한것은 미국평화봉사단의 사무실이 옳다고 생각해서다.월드뱅크매거진에 옵저버라는 것이 있다.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옵저버가 아닌가 괴로워했다.자식이 태어나니 아이의 교육과 나의 꿈사이에서 충돌도 하고 내아이가 잘되어야 내 미래가 있지 않는가해서 한여름에
길거리의 트럭에서 수박을 팔기도 햇다. 하루종일 길거리에 서있으니 저녁에 집에 오면 얼굴이 화끈거린다.내가 식다응로 일하러 가기전에 서울에서 코바 출신이라며 코바를 도와달라고 왠 노인이 내려오셧다. 나이가 70줄인데 국제개발에 10년간 일을 햇다는 것이다.한데 잠시 이야기을 나누어 보니 자식과 좀 관계가 ...그리고 외국에서 돌아와 살 집이 있나 생각을 해 보앗다. 그분은 캄보디아로 다시 나가셧다. 대학에서 근무한다고는 하는데 ...친구분인지 누구인지 말을 ...감시받는 기분도 들고...조용한 곳으로 모셔서 그분의 이야기도 들어주었어야 하는데 대전에서는 조용히 이야기할 식당이나 한정식식당이 별로 없다.그리고 방글라데시에서 보니 태국식당은 그나라에서 고급으로 내실도 갖추고 해산물 요리을 하는 고급식당인데 지금 대전에 태국식당들은 내실도 없고 그냥 그렇다. 그리고 배트남에는 가보지 않아 잘 모른다. 아마 대전에 베트남 식당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애아빠와 결혼해서 얼마안되어 애아빠가 애낳고 6개월지나서 돈을 조금씩 주어서 대전에 와서 여자조카 생일 이라 문화동 세이맥화점에 기독교연합봉사관 일층에 베트남식당에 가서 월남쌈 등을 사주며 이곳이 외국에서는 고급식당이란다. 예의을 갖추어야한다.하고 이야기하고 몇개정도의 월남쌈은 집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을위해 준비하라고 했다.

지금은 내가 가진 네트워크가 거의 사라졌다. .....너무 실망을 해서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다.내친구중에 하나가 내가 조카들을 돌보니 아이들이 끄나풀이라고 언젠가 이야기해서 까우뚱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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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애아빠는 내가 처음에 만났을 때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라고 이야기하고
막내남동생이야기을 하자 몇개월후 남동생이 집으로 왔다.
첫만남. 설레임. 꿈을 꾸게 한 사람.이젠 세월로 흐르고 난 말에서 팥죽을 한그릇 먹어 국제기구에 나갈수없어 한국에서 봉사단글도 쓰고 외국인근로자에게 봉사활동하며지냈는데..
2002년인가20여년전에 안양에 무역직면접보러 다녀오면서 안양자역지에 외국인이 아파서 치료을 받는데 어려운 환경를 기사화해서 보고 대전에서 한국에도 외국인치료병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2004년그후 대전여성신문 대전지사 사무국장으로 일할때 조선일보인가를 보니 한국에 외국인근로자병원이 들오섰다고 뉴스에 나왔다.
홍콩에갈려고 준비했는데 월급이 계속밀려서 홍콩을 못갔었다.한데 내가 무슨일을 할려고 만 하면 이상하게 잘리거나 돈이 없다. 제세산업에서도 중국에 심양에 파견하기로 되어 있어서 유천동 필립여행사에서 여권을 만들고 중국비자을 만들었는데 술을 마시지못한다는 이유로 중국에 파견을 못가고 한국무역협회에서 바이오 검색을 해서 중남미와 화상무역상담을 앞두고 잘렷었다.나중에 보니 내 다이어리도 사라?다. 그때 경리가 나와 12살차이인데 목원대 나왔었고 같은 성모여고을 나온 후배라고 햇다. 겨울에 반팔을 입고 난로앞에서 모바일폰을 계속하고 있엇다.서울에서 내려온 남자친구이야기을 하며 목원대는 서울에서 내려온 애들이 원룸에 많이 산다고 했었다.ㅏ장이 없으면 사장의 세단 검정자가용을 타고 다녀서 놀래기도 하고...보험을 한다고 햇던가근무중이라 그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엇는데 ...고자세라언니가 과학연구단지에서 일한다고 했다.
사장은 사업에 망해서 부모에게 자금을 끌어와 일을 시작한다고 햇다. 청년회의소 이야기도 하고 말이다.체팅으로 연락한 사람이 포항에서 과메기을 보내왓다고 같이 먹자고 해서 먹을 적이 있다.충남대 유네스코동기들이 울산에서 모인다고 해서 갈려다 못갓다. 그 친구들은 몇박며칠도 냉장고을 다 털고 왔다고 한다.
2003년에 대전에서 한 난집에서 일하는데 중국에 한 고위직 공산당당원이 비닐하우스인가 농장에서 일한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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